소비자들은 모호하거나 극히 한정된 선택지 앞에서 본인이 선호하는 바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명확하거나 추가적인 선택 안을 주면 기준점 효과, 대비 효과가 나타나 선택이 훨씬 수월해지는데요, 물건을 구매하는 것부터 형량을 구형하는 일까지.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두 효과의 메커니즘을 사례와 함께 알아봅니다.

 

 

합리적 판단을 방해하는 족쇄, 앵커링


앵커(Anchor), 배를 정박시키는 데 쓰이는 닻을 말합니다. 바다를 지키는 해군이나 선원을 의미하기도 하죠. 이 앵커라는 말이 요즘 가장 '핫'한 학문 행동 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흔히 정박 효과 또는 기준점 효과로 불리는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는 소비자가 가장 처음 접한 정보에 집착해 합리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현상을 일컫는 행동 경제학 용어입니다. 즉 소비자의 머릿속에 특정 가격을 미리 심어두면(닻을 내려두면) 소비자들은 객관적 요인보다 이 숫자를 기준 삼아 제품의 가격이 싼 지 비싼지를 판단하는 겁니다.

 

대형 마트에서 냉장고를 판매할 때 정상 가격 100만 원을 일부러 보이게 써놓고 그 위에 할인 가격 80만 원을 제시하는 식이 대표적입니다. 소비자들은 이 80만 원이 적정한 가격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단하지도 않은 채 무조건 “20만 원을 아꼈다”며 횡재한 기분을 느끼는데요, 소비자가 냉장고 구매를 결정하는 기준점(Reference Point), 즉 닻이 닿은 부분이 100만 원에 형성됐기 때문이죠.

 

눈앞에 990원짜리 펜과 1,000원짜리 펜이 나란히 놓여있을 때도 마찬가지인데요, 대다수 사람은 990원짜리 펜을 1,000원짜리 펜보다 훨씬 싼 제품이라고 인식합니다. 실제 가격 차이는 10원에 불과한데도 말입니다. 심지어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만 5,000원짜리 제품과 1만 5,490원짜리 제품 중 어떤 상품이 더 저렴하냐”고 묻자 전자라고 대답한 사람보다 후자라고 대답한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990원과 1,000원’을 비교할 때와 마찬가지로 소비자들은 뒷자리가 복잡한 숫자를 더 작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선택의 대상'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교하기 쉬운 대상'을 비교합니다. 이를 행동 경제학 용어로 대비 효과(Contrast Effect)라고 합니다.

 

 

 

 

인간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 나약한 존재?


사람들은 왜 이런 판단 오류를 일으킬까요? 답을 얻으려면 우선 행동 경제학이 어떤 학문인지부터 파악해야 하는데요, 행동 경제학은 경제학과 심리학이 결합한 일종의 퓨전 학문으로 비합리성을 지닌 인간의 경제활동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정통 경제학에서는 인간이 컴퓨터나 계산기처럼 일정한 논리(이성)에 근거해 항상 합리적인 결정만을 내린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기준점 효과에서 보듯 인간은 결코 합리적인 판단만을 내리는 존재가 아니죠.

 

인간의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행동 경제학 용어는 ‘손실 회피(Loss Aversion)’입니다. 심리학 연구 결과 인간은 주식 투자로 100만 원을 벌었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 100만 원을 잃었을 때 훨씬 큰 괴로움을 느끼는 존재’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면 100만 원을 벌었을 때 느끼는 기쁨과 잃었을 때 느끼는 괴로움이 똑같아야 하지만 사실상 비합리성을 지닌 인간은 기쁨보다 괴로움을 더 많이 느끼는 것입니다.

 

행동 경제학의 창시자는 이스라엘 출신 유대계 미국인인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으로 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교수입니다. 대다수 경제학자가 인간을 이성적인 판단을 지닌 주체,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봤다면, 그는 인간의 사고와 행동이 합리적이지 않다는 전제를 통해 각종 경제 현상을 해석하려고 애썼습니다. 1979년 손실 회피를 주제로 쓴 논문 '전망 이론(Prospect Theory)’을 발표한 후부터 줄곧 행동경제학 연구에 매진한 그는 이를 집대성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심리학자 최초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습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을 때만 해도 ‘다른 경제학자가 잘 연구하지 않는 틈새 분야를 개척해 노벨상을 탔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008년 전대미문의 세계 금융위기가 발생한 후 천문학적 연봉을 받는 월가 경영진이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행동 경제학과 카너먼 교수의 위상은 더 높아졌습니다. 게다가 행동 경제학 분야의 대가인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 예일대 교수가 2013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으면서 행동 경제학이 경제학의 전면에 당당히 등장했습니다.

 

 

앵커링 효과로 소비자의 지갑을 열다


많은 기업은 기준선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360도 달라지는 소비자의 행동 특성을 고려해 앵커링 효과를 이용한 다양한 마케팅을 구사합니다. 우선 명품업체들이 백화점 매장의 가장 눈에 띄는 곳에 3,000만 원짜리 에르메스 가방을 진열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때 명품업체의 진짜 속내는 소비자로 하여금 3,000만 원짜리 가방을 사도록 하는 게 아닙니다. 3,000만 원이라는 비싼 기준점을 제시한 후 소비자로 하여금 ‘아! 저렇게 비싼 가방도 있는데 10분의 1 가격인 300만 원짜리 루이뷔통이나 프라다 가방은 별로 비싸지 않아.’라고 착각하게 만든 후 지갑을 열게 하는 것이 진짜 목적입니다.

 

아이폰으로 전 세계인을 열광시킨 애플도 기준점 효과를 잘 이용한 대표적 기업입니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처음 출시했을 때 당시 가격은 599달러였는데요, 애플은 몇 달 만에 곧바로 399달러로 가격을 인하했고 아이폰 판매는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600달러라는 기준점을 지닌 소비자들에게 ‘200달러 할인은 횡재’라는 심리적 자극을 가해 기준점 효과를 극대화한 겁니다. 유행이 지난 옷을 폭탄 세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망소비자 가격을 15만 원이라고 써놓고 7만원에 팔면 훨씬 많은 구매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원래 가격이 높으면 할인 폭이 더 커지는 듯 보여 사람들의 충동구매를 자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기준점 효과는 비즈니스 협상에도 널리 쓰이는데요, 즉 가격을 두고 거래 상대방과 협상할 때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가격을 조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먼저 등장한 협상 가격이 서로의 머릿속에 기준점으로 남기 때문이죠. 일례로 기업 A를 인수하고 싶어 하는 기업 B가 있습니다. 회계법인 및 컨설팅 회사가 산정한 적정 인수 가격은 100억 원이지만 워낙 알짜인 회사라 내심 120억 원까지 마음에 둔 상태입니다. 두 회사의 대표단이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습니다. A 측 대표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200억 원이 아니면 절대 회사를 넘길 수 없다”고 선포합니다. 이때부터 마라톤 협상에 돌입합니다. 한 달간의 줄다리기 끝에 양측은 150억 원에 합의를 봅니다. 적정 가격보다 50억 원 비싸고, 기업 A가 처음 생각했던 120억 원보다도 30억 원이 많지만 왜 기업 B는 이 가격에 합의했을까요? A가 부른 200억 원에 기준점이 맞춰진데다 한 기업의 적정가치를 일반 공산품처럼 딱 부러지게 가격을 매길 수 없으므로 ‘일단 상대방이 주장한 200억 원에서 50억 원이나 깎았고, 고로 나는 손해 보지 않았다’는 심리가 작동한 겁니다.

 

 

삶의 곳곳을 파고든 앵커링 효과


앵커링 효과는 단순히 상품 마케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사회활동과 일상생활에 광범위하게 또 지속해서 영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독일 심리학자 프리츠 스트랙(Frits Strack)과 토머스 무스바일러(Thomas Mussweiler)가 판사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살펴볼까요? 이들은 2006년 기자들을 시켜 강간범 재판을 맡은 판사들에게 쉬는 시간에 전화를 걸어 '형량이 3년 이하냐 혹은 1년 이하냐'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놀랍게도 판사들의 형량 선고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형량이 3년 이하냐'라는 질문을 받은 판사들은 평균 3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한 반면 ‘1년 이하냐'는 질문을 받은 판사들은 평균 25개월의 징역형을 내린 것입니다.

 

강력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다소 부족해 보이는 ‘1년 이하의 형량’을 언급하는 자체가 판사들로 하여금 평소보다 낮은 형량을 구형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일을 강요하지 않고 ‘팔꿈치로 살짝 찌르는(넛지•Nudge)’ 방식으로 개입하면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선택을 강요받으면 무의식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인간의 특성을 역으로 이용한 방법입니다.

 

크리스토퍼 시(Christopher Hsee)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의 전화번호 실험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는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전화번호 중 뒤의 세 자리를 적게 한 후 '로마제국의 멸망 연도는 언제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대부분 자신의 전화번호와 굉장히 유사한 숫자를 적어 냈습니다. 질문을 듣기 전 먼저 적어낸 자신의 전화번호가 기준점 역할을 했기 때문이죠. 왜 이러한 결과가 나왔을까요? 이는 대부분의 사람이 로마의 멸망연도에 대한 사전 지식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 자신이 의지할 정보가 없으면 이 실험에서처럼 전혀 상관없는 정보, 하지만 자신이 잘 알고 매우 익숙한 정보를 무의식중에 꺼내고 맙니다. 이처럼 기준 설정에 사용할 정보가 부족해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을 때 인간이 사용하는 어림짐작을 휴리스틱(Heuristics)이라고 합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은 이러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흔들리는 갈대다.’ 기준점 효과에 따른 의사결정 변화를 고려할 때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잘 묘사한 문구는 없을 듯합니다. 타인이 제시한 기준점에 쉽게 동조하고, 그 기준점이 자신의 선택에서 나온 것이라고 착각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결국, 한 기업의 흥망성쇠는 소비자에게 앵커링 효과를 얼마나 자연스럽게 구사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Writer.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금융공학

댓글을 달아 주세요